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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예술가들

단원 김홍도, 조선회화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화가

by 소소한그날 2025.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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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金弘道)
김홍도는 조선후기 군선도병, 단원풍속화첩, 무이귀도도 등의 작품을 그린 화가이다. 1745년(영조 21)에 태어났고 사망일은 미상이다. 강세황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 29세 때 영조와 왕세자의 어진을 그렸고, 정조의 명으로 금강산 일대를 기행하고 명승지를 그려 바치기도 했다. 50세 이후로 한국적 서정과 정취가 짙게 밴 실경 산수화를 즐겨 그리면서 단원법이라 불리는 세련된 화풍을 이룩했다. 서민들의 생활상을 해학적 감성으로 표현한 독창적인 풍속화도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회화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화가다.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사능(士能), 호는 단원(檀園)·단구(丹邱)·서호(西湖)·고면거사(高眠居士)·취화사(醉畫士)·첩취옹(輒醉翁). 만호를 지낸 진창(震昌)의 종손이자 석무(錫武)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김홍도는 당대의 감식가이며 문인화가인 강세황(姜世晃)의 천거로 도화서화원(圖畫署畫員)이 되었다. 강세황의 지도 아래 화격(畫格)을 높이는 동시에, 29세인 1773년에는 영조의 어진(御眞)과 왕세자(뒤의 정조)의 초상을 그렸다. 그리고 이듬해 감목관(監牧官)의 직책을 받아 사포서(司圃署)에서 근무하였다. 1781년(정조 5년)에는 정조의 어진 익선관본(翼善冠本)을 그릴 때 한종유(韓宗裕)·신한평(申漢枰) 등과 함께 동참화사(同參畫師)로 활약하였으며, 찰방(察訪)을 제수받았다.

이 무렵부터 명나라 문인화가 이유방(李流芳)의 호를 따라 ‘단원’이라 자호하였다. 1788년에는 김응환(金應煥)과 함께 왕명으로 금강산 등 영동 일대를 기행하며 그곳의 명승지를 그려 바쳤다. 그리고 1791년 정조의 어진 원유관본(遠遊冠本)을 그릴 때도 참여하였다. 그 공으로 충청도연풍 현감에 임명되어 1795년까지 봉직하였다. 현감 퇴임 후 만년에는 병고와 가난이 겹친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여생을 마쳤다.

조희룡(趙熙龍)의 "호산외기(壺山外記)"와 홍백화(洪白華)의 발문(김응환이 김홍도에게 그려준 시화첩 "금강전도"에 쓴 글)에 의하면, 그는 외모가 수려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또한 도량이 넓고 성격이 활달해서 마치 신선과 같았다 한다. 그는 산수·도석 인물(道釋人物)·풍속·화조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당대부터 이름을 크게 떨쳤다.

서당(단원-풍속도첩),조선,김홍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쪼그리고 돌아앉아 훌쩍이는 학동을 화면의 초점에 두고, 그 주위에 방건(方巾)을 쓰고 유생의 옷차림을 한 훈장을 축으로 학동들을 둥글게 배치하였다. 화면의 구성이나 생략된 배경, 옷주름의 필치, 얼굴 모습 등 모두가 현장감 넘치는 분위기를 준다. 서러움이 완연한 학동의 표정도 재미있지만, 주변 인물들의 익살스러운 모습에도 정감이 넘쳐나,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미소를 머금게 한다.

춤추는아이(단원풍속도첩), 조선, 김홍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이 화첩은 김홍도의 풍속도를 엮은 화첩이다. 1918년 조한준(趙漢俊)에게서 구입했고 모두 27점이었으나 1957년 원 화첩의 수미에 위치한 〈군선도〉2점은 별도의 족자로 만들고 풍속도 25점만 새롭게 화첩으로 꾸미고 《단원풍속도첩》이란 명칭을 붙였다. 이 화첩에 속한 그림 중 4점이 1934년 간행된 『조선고적도보』에 게재되었다. 이 화첩은 1)서당, 2) 논갈이, 3) 활쏘기 4) 씨름, 5) 행상, 6) 무동, 7) 기와이기, 8) 대장간, 9) 노상과안, 10) 점괘, 11) 나룻배, 12) 주막, 13) 고누놀이, 14) 빨래터, 15) 우물가, 16) 담배썰기, 17) 자리짜기, 18) 벼타작, 19) 그림감상, 20) 길쌈, 21) 편자박기, 22) 고기잡이, 23) 산행, 24) 점심, 25) 장터길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작품명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각 계층의 생업장면과 놀이 등 생활의 이모저모가 잘 나타나 있다. 예외도 없지 않으나 대체로 배경을 생략하고 등장인물들이 취하는 자세와 동작만으로 적절한 화면구성을 이루고 있다. 평범한 일상사이나 화가의 따뜻한 시선과 예리한 시각에 의한 순간의 포착은 이를 볼거리로 부각시켜 그림이 그려진 사회분위기를 잘 전한다.

장터길(단원 풍속도첩), 조선, 김홍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산모퉁이를 돌아가는 한 무리의 가마 행렬을 그린 것이다. 앞서 가는 소와 가운데에 있는 말등에 아무 것도 실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장터에서 물건을 다 팔고 돌아가는 길인 듯하다. 장사가 잘 되었는지 전체적으로 밝고 경쾌한 느낌이다.


작품세계
정조는 “회사(繪事)에 속하는 일이면 모두 홍도에게 주장하게 했다.”고 할 만큼 그를 총애했다. 그리고 강세황으로부터는 ‘근대 명수(近代名手)’ 또는 ‘우리나라 금세(今世)의 신필(神筆)’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편이며, 대체로 50세를 중심으로 전후 2기로 나누어지는 화풍상의 변화를 보인다.

산수화의 경우 50세 이전인 1778년 작인 "서원아집육곡병(西園雅集六曲屛)"(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 말해 주듯이, 주로 화보(畫譜)에 의존한 중국적인 정형 산수(定型山水)에 세필로 다루어지는 북종 원체화적(北宗院體畫的) 경향을 나타내었다.

연풍 현감에서 해임된 50세 이후로는 한국적 정서가 어려 있는 실경을 소재로 하는 진경산수(眞景山水)를 즐겨 그렸다. 그러면서 ‘단원법’이라 불리는 보다 세련되고 개성이 강한 독창적 화풍을 이룩하였다.

김홍도필추성부도, 조선, 김홍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물론 석법(石法)·수파묘(水波描) 등에서 정선(鄭敾)·심사정(沈師正)·이인상(李麟祥)·김응환의 영향이 다소 감지된다. 하지만 변형된 하엽준(荷葉皴: 산봉우리나 바위 주름의 형태를 연꽃 잎새의 줄기와 같은 모양으로 나타내는 방법)이라든지 녹각 모습의 수지법(樹枝法), 탁월한 공간 구성 그리고 수묵의 능숙한 처리, 강한 묵선(墨線)의 강조와 부드럽고도 조용한 담채(淡彩: 엷은 채색)의 밝고 투명한 화면 효과는 한국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김홍도 특유의 화풍이다.

만년에 이르러 명승의 실경에서 농촌이나 전원 등 생활 주변의 풍경을 사생하는 데로 관심이 바뀌었다. 이러한 사경(寫景) 산수 속에 풍속과 인물·영모 등을 가미하여 한국적 서정과 정취가 짙게 밴 일상사의 점경으로 승화시키기도 하였다. 그는 산수뿐만 아니라 도석인물화에서도 자신만의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였다.

전기에는 도석 인물 중 주로 신선도를 많이 다루었다. 굵고 힘차면서도 거친 느낌을 주는 의문(衣文: 옷자락 무늬), 바람에 나부끼는 옷자락 그리고 티 없이 천진한 얼굴 모습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이 시기의 신선 묘사법은 1776년에 그린 「군선도병(群仙圖屛)」(삼성미술관 소장, 국보 제139호)에서 그 전형을 찾아볼 수 있다. 후기가 되면 화폭의 규모도 작아지고, 단아하면서도 분방하며 생략된 필치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도석인물화와 더불어 그를 회화사적으로 보다 돋보이게 한 것은 그가 후기에 많이 그렸던 풍속화이다. 조선 후기 서민들의 생활상과 생업의 점경이 간략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원형 구도 위에 풍부한 해학적 감정과 더불어 표현되고 있다. 그의 풍속화들은 정선이 이룩한 진경산수화의 전통과 더불어 조선 후기 화단의 새로운 경향을 가장 잘 대변해 준다.

그가 이룩한 한국적 감각의 이러한 화풍과 경향들은 그의 아들인 양기(良驥)를 비롯하여 신윤복(申潤福)·김득신(金得臣)·김석신(金碩臣)·이명기(李命基)·이재관(李在寬)·이수민(李壽民)·유운홍(劉運弘)·엄치욱(嚴致郁)·이한철(李漢喆)·유숙(劉淑) 등 조선 후기와 말기의 여러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 등 한국화 발전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앞서 설명한 작품 외에 그의 대표작으로는 "단원풍속화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527호)을 비롯해서 "금강사군첩(金剛四君帖)"(개인 소장), "무이귀도도(武夷歸棹圖)"(간송미술관 소장), "선인기려도(仙人騎驢圖)", "단원도(檀園圖)"(개인 소장)와 "섭우도(涉牛圖)", 기노세련계도(耆老世聯稧圖), 단원화첩(삼성미술관 소장),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 등이 있다.

 

출처 : e-뮤지엄(전국박물관소장품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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