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경 산수화의 창시자 정선(鄭敾)
정선은 조선후기 "인왕제색도", "금강전도", "통천문암도" 등을 그린 화가이다. 1676년(숙종 2)에 태어나 1759년(영조 35)에 사망했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하며 김창집의 도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중국의 남종화법과 오파의 새로운 산수화 기법을 수용하고 시서화 일체 사상을 중시하던 문인들과 교유하면서 독창적인 회화세계를 열었다. 거기에 자기 나름의 필묵법을 개발하여 조선의 실제 자연을 담아낸 뛰어난 진경산수화를 개척했다. 겸재파 화법이라 할 수 있는 실경산수화는 19세기 초반까지 화단에 큰 영향을 주었다.
생애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원백(元伯), 호는 겸재(謙齋), 겸초(兼艸), 난곡(蘭谷). 아버지는 시익(時翊)이며, 어머니는 밀양 박씨(密陽朴氏)이다. 2남 1녀 중 맏아들이다. 그의 선세(先世)는 전라남도 광산(현 광주광역시), 나주 지방에서 세거한 사대부 집안이었다. 뒤에 경기도 광주로 옮기고, 고조부 연(演) 때 서울 서쪽〔西郊으로 다시 옮겨 살기 시작하였다.
1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늙은 어머니를 모시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하며 김창집(金昌集)(조선 후기에,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의 도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위수(衛率: 왕세자를 따라 호위하는 직책)라는 벼슬을 비롯하여, 1729년에 한성부주부, 1734년 청하현감을 지냈다. 또 자연 · 하양의 현감을 거쳐 1740년경에는 훈련도감낭청(訓練都監郎廳), 1740년 12월부터 1745년 1월까지는 양천의 현령을 지냈다.
그 뒤 약 10년 동안은 활동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1754년에 사도시첨정(司䆃寺僉正), 1755년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그리고 1756년에는 화가로서는 파격적인 가선대부 지중추부사(嘉善大夫知中樞府事)라는 종2품에 제수되기까지 하였다.
활동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었다는 기록과 현재 남아 있는 30세 전후의 금강산 그림 등을 통하여 젊었을 때 화가로서 활동한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40세 이전의 확실한 경력을 입증할 만한 작품이나 생활 기록 자료는 없다. 그가 중인(中人)들이 일하고 있었던 도화서 화원(圖畫署畫員)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의 집안은 원래 사대부 출신으로 신분상의 중인은 아니며 몇 대에 걸쳐 과거를 통하여 출세하지 못한 한미한 양반이었다. 그리고 그의 뛰어난 그림 재주 때문에 관료로 추천을 받았으며 마침내 화단에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정선 필 신묘년풍악도첩(보물)
위 작품은, 정선 필 신묘년풍악도첩(보물) 중에서 세 작품만 올렸다.
정선의 그림 중 최초의 기년작으로 추정되는 신묘년 풍악도첩은 그의 나이 36세 때 그린 것이다. 모두 13첩의 편화와 내력과 화첩 이름을 담은 발문이 1첩으로 돼 있다. 발문에는 1711년에 겸재와 같은 동네(서울 인왕산 자락)에 살았던 백석공(白石公) 신태동(1659∼1729)이 두 번째 금강산 여행을 할 때 정선과 함께 하여 금강산도를 사생케 하였다는 내용이 전한다. 이 화첩에 그려진 금강산은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의 주요 명승을 담고 있으며 금강산의 형세와 특징에 따라 대각선과 원형구도를 적절하게 사용하고, 미점과 피마준, 수직준 등을 다양하게 구사하였다. 특히 금강내산에 묘사된 경물은 중심이 되는 대상을 크게 부각시키고, 빽빽한 구도를 사용하였다. 산봉우리마다 명칭을 적어놓고 길을 뚜렷이 표시한 것은 조선시대 지도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정선의 초기작은 사경산수와 회화식 지도의 전통에 근거하여 마침내 진경산수화라는 새로운 양식을 개척하였음을 말해준다.
지금까지 막연한 중국의 자연을 소재로 하던 시나 문학의 영향에서 이루어진 산수화의 화제(畫題)는 빛을 잃고, 대신 우리 자연으로 대치하게 되는 시기에 태어난 그는 마침 중국에서 밀려 들어오는 남종화법(南宗畫法)이나 오파(吳派)와 같은 새로운 산수화 기법에 접하게 되었다. 또 당시 유행하게 된 시서화 일체 사상을 중시하던 문인들 사이에 참여하여 자신의 교양을 높이거나 창작하는 계기를 얻게 되었다.
특히 이병연(李秉淵) 같은 시인(조선후기 "사천시초"를 저술한 시인)과의 교우를 통하여 자기 회화 세계에 대한 창의력을 넓히고 일상적 생활의 주제를 회화로 승화시킬 수 있는 자극을 받게 되었다. 우리나라 자연을 다룬 그의 화제들은 당시 기행문의 소재였던 금강산, 관동지방의 명승 그리고 서울에서 남한강을 오르내리며 접할 수 있는 명소들과 그가 실제 지방 수령으로 근무하던 여가에 묘사한 것들이다.
그밖에도 자기 집과 가까웠던 서울 장안의 사철의 경치들, 특히 인왕산 동북 일대의 계곡과 산등성이들이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문인지우(文人知友)들과 관련되는 여러 곳의 명소나 특수한 고장들의 자연을 다루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사도(故事圖) 같은 중국적 소재도 많이 다루고 있으며, 성리학자들의 고사도 제작에서 그의 관심거리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
작품세계
회화 기법상으로는 전통적 수묵화법(水墨畫法)이나 채색화(彩色畫)의 맥을 이어받기도 하지만, 자기 나름대로의 필묵법(筆墨法)을 개발하였다. 이것은 자연미의 특성을 깊이 관찰한 결과이다. 예를 들면, 삼성미술관(三星美術館) 소장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조선 후기의 화가 정선의 대표작. 영조 27년(1751)에 동쪽에서 본 서울 인왕산을 그린 그림이다. 우리나라 국보이다)에서는 인왕산의 둥근 바위 봉우리 형태를 전연 새로운 기법으로 나타내었다. 즉, 바위의 중량감을 널찍한 쉬운 붓으로 여러 번 짙은 먹을 칠하여 표현(적묵법(積墨法))한다.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의 "통천문암도(通川門巖圖)" 에서는 동해안 바위 구조를 굵직한 수직선으로 처리하여 세밀한 붓놀림이나 채색 · 명암 등 효과를 무시하면서도 물체의 외형적 특성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 두드러진 붓 쓰임의 한 예는 서울 근교나 해금강은 물론 우리 나라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소나무의 묘사법이다. 몇 개의 짧은 횡선과 하나의 굵게 내려긋는 사선(斜線)으로 소나무의 생김새를 간략하면서도 사실적으로 그린다.
삼성미술관 소장의 1734년 작 "금강전도(金剛全圖)" (130.7×95㎝)는 금강내산(金剛內山)을 하나의 큰 원형 구도로 묶어서 그렸다. 이는 기법상 천하도(天下圖)라는 전통적인 지도 제작 기법에 근거하며, 금강내산을 한 떨기 연꽃 또는 한 묶음의 보석 다발로 보는 종래의 자연 묘사시에서 조형적 원리(造形的原理)를 따오는 기발한 착상이다.
정선 필 금강전도(국보)
조선 후기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강산을 실제로 보고 그리는 진경산수화풍을 연 겸재 정선(1676∼1759)이 영조 10년(1734)에 내금강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내금강의 실경을 수묵담채로 그렸으며 크기는 가로 94.5㎝, 세로 130.8㎝이다. 전체적으로 원형구도를 이루고 있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본 모습이다. 눈덮인 봉우리들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긋는 수직준법을 이용하여 거칠고 날카로운 모습으로 표현하였고, 이와 함께 위쪽에는 비로봉이 우뚝 솟아 있으며, 화면 중심으로는 만폭동 계곡이 위에서 아래로 가로지르고 있다. 바위로 이루어진 메마른 느낌의 봉우리들과는 대조적으로 왼편에는 무성한 숲을 이룬 부드러운 토산이 놓여 있는데, 이는 붓을 옆으로 눕혀 점을 찍는 방식으로 나타내었다. 화면의 윗부분에는 그림의 제목과 함께 작가의 호, 그림에 대한 감상 등이 적혀 있다.
당시의 산수화는 주로 중국 산수화를 보고 그린 것인데 반해 이 그림은 직접 우리나라의 실경를 보고 그린 것으로 정선이 그린 금강산그림 가운데에서도 가장 크고, 그의 진경산수화풍이 잘 드러난 걸작이라 할 수 있다.
우선, 원형을 대강 오른쪽의 골산(骨山: 금강내산의 화강암 바위로 된 삐쭉삐쭉한 모습)과 왼쪽의 토산(土山: 금강내산의 수림이 자라는 둥근 멧부리)으로 구분하되, 골산은 예리한 윤곽선으로, 토산은 그의 독특한 침엽수법(針葉樹法)과 미점(米點)으로 묘사한다. 그 다음 이 원형 외곽을 엷은 청색으로 둘러 여타 공간을 생략함으로써 산 자체만을 돋보이게 한다.
골짜기마다 흐르는 물은 원의 중심이 되는 만폭동(萬瀑洞)에 일단 모이게 하여 구도상의 중심을 이룬 다음, 화면의 앞쪽으로 흘러 장안사(長安寺) 비홍교(飛虹橋)를 지난다. 이 그림은 실제의 자연을 새로 해석하여 조형화한 좋은 예이며, 오른편 위쪽에 쓴 제시(題詩)의 내용과 형태가 일치한다.
정선의 회화 기법은 다른 화가들에 비하여 아주 다양하여 정밀 묘사법에서부터 간결하고 활달한 사의화(寫意畫: 묘사 대상의 생긴 모습을 창작가의 의도에 따라 느낌을 강조하여 그린 그림)까지 있어, 자연에서 얻은 인상을 나름대로 재구성하는 과감성과 회화의 원리를 발전시키는 등 여러 단계의 작품을 보여 준다. 이 가운데 특히, 우리 주위에서 친숙하게 대할 수 있는 구체적 자연을 특징짓는 기법이 독창적인 면이다.
이러한 그의 창의력은 그가 즐겨하였다는 역(易)의 변화에 대한 이해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림의 소재 · 기법 어느 것에나 구애됨이 없이 소화하였으며, 심지어 지두화(指頭畫)(붓과 같은 도구를 이용하지 않고 손의 일부를 사용하여 그린 그림. 지묵 · 지화)까지도 실험하고 있다. 또한 문인들과의 가까운 교류와 자신의 성리학에 대한 지식 등 중국 고전 문학과 사상도 두루 섭렵하여 이들을 조형 세계에 반영하고 있다.
특히 이미 청나라 문인들 사이에서도 유행한 시화첩(詩畫帖) 같은 것은 선비들간에 시 짓고 그림 그리기와 글씨 쓰기 놀이를 통하여 이루어지는데, 실경 산수화를 다루는 경우에는 시인들과 함께 하는 여행에서 이루어질 때도 있다.
정선은 이미 말한 노론의 명문인 안동 김씨네와의 관계에서 관로(官路)에 진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진적인 사상과 우수한 수장품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김창흡(金昌翕)(조선 후기에, "삼연집", "심양일기" 등을 저술한 학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특정한 파벌에만 치우치지 않은 매우 폭넓은 교우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생애 후반의 계속적인 승진은 영조가 세제로 있을 때 위솔이라는 직책으로 있었기 때문에 입은 배려로 생각된다. 이것이 노년에도 창작에 전념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라고 하겠다.
평가
정선은 선비나 직업 화가를 막론하고 크게 영향을 주어 겸재파 화법(謙齋派畫法)이라 할 수 있는 한국 실경 산수화의 흐름을 적어도 19세기 초반까지 이어가게 하였다. 이들 중에는 강희언(姜熙彦), 김윤겸(金允謙), 최북(崔北), 김응환(金應煥), 김홍도(金弘道), 정수영(鄭遂榮), 김석신(金碩臣)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두 아들인 만교(萬僑)와 만수(萬遂)는 아버지의 가업을 잇지 못하고 손자인 황(榥)만이 할아버지의 화법을 이어받고 있다.
정선에 관한 기록은 어느 화가보다 많으며 작품 수도 가장 많다. 그러나 그가 지었다는 "도설경해(圖說經解)"라는 책과 유고(遺稿) 수십 권은 전하지 않으며, 자작시나 화론(畫論)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그를 더 깊이 연구하는 데 아쉬움을 주고 있다. 또한 초년기의 작품이 거의 밝혀지지 않아 화가로서의 생애를 전부 조명하는 데 공백이 있다.
출처 : e-뮤지엄(전국박물관소장품검색), 한국민속대백과사전, 국가유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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