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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예술가들

장 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by 소소한그날 2025.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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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전시가 진행 중인 장 미셸 바스키아, 예매가 어려울 정도로 인기 있는 전시다. 처음 바스키아 전시를 본 게 십 년이 넘었다. 그때는 이번 전시처럼 작품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꽤 멋진 작품들을 감상했었다. 

 

장 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장미셸 바스키아(프랑스어: Jean-Michel Basquiat, 1960년 12월 22일 ~ 1988년 8월 12일)는 미국에서 태어난 작가이자 그라피티 예술가이다. 유명한 현대 미술가 키스 해링과 절친이었다. 또, 오리를 좋아했다. 아버지가 아이티계, 어머니가 푸에르토리코계다. 그는 1970년대 뉴욕에서 그라피티 그룹 SAMO의 일원으로 처음 이름을 날렸다. 이후 사이 톰블리, 장 뒤뷔페 등의 영향을 받은 1980년대 신표현주의와 원초주의로 세계적인 성공을 거뒀으나,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1988년 8월 27세에 생을 마감했다.

바스키아의 작품은 '암시적인 이분법'(부와 가난, 통합과 분리, 내면과 외면 등)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시와 그림의 전유를 통해 이미지와 텍스트, 추상과 형체, 역사적 정보와 현대 비평을 긴밀히 결합시켰다. 또한 바스키아는 작품에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담음으로써 "개인에 대한 진실을 더욱 심오하게" 하면서 사회에 뿌리박힌 권력 구조와 인종차별주의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그의 시는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계급 투쟁에 대한 지지를 매우 직접적으로 드러냈다.

 

생애
장미셸 바스키아는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사남매의 둘째로 태어났다. 밑으로 여동생 리잔(Lisane, 1964년생)와 자닌(Jeanine, 1967년생)이 있었다. 아버지 제라르 바스키아(Gerard Basquiat, 1930 – 2013.7.7)는 아이티 포르토프랭스 출신이었고, 어머니 마틸데 안드라데스(Matilda Andrades, 1934.7.28 – 2008.11.17)는 푸에르토리코계 미국인으로 브루클린 출신이었다.

어머니는 바스키아에게 맨해튼의 미술관에 같이 가고 브루클린의 미술관의 어린이 회원으로 등록시킴으로써 예술에 관한 관심을 불어넣어 주었다. 바스키아는 4살 때 이미 읽고 쓰는 법을 배운 조숙한 아이였고 천부적인 재능의 예술가였다. 그의 선생님이자 예술가였던 호세 마차도(Jose Machado)는 그의 예술적 능력을 알아보았고 어머니는 아들의 예술적 재능을 더욱 격려하였다. 11살 때, 바스키아는 프랑스어, 스페인어, 영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읽고 쓸 수 있었다. 1968년 9월, 바스키아가 8살이 되던 해에 길거리에서 놀다가 차에 치어 팔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고, 결국 비장절제술을 받았다. 회복될 동안 어머니는 가져다 준 그레이 해부학 책을 읽었는데, 이 책은 그가 미래에 예술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될 것을 증명하였다. 부모님은 그 해에 이혼하였고 자신과 동생들은 아버지 밑에서 키워졌다. 가족은 브루클린 보럼 힐에서 5년 동안 살았고 1974년 푸에르토리코 산후안으로 이사하였지만 2년 후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다.

그가 13살이 되던 해 어머니 마틸데는 정신병원에 가게 되었고 이후 그녀는 병원을 전전하며 여생을 보냈다. 15살이 되던 해, 바스키아는 집을 나와 톰프킨스 스퀘어 공원의 벤치에서 잠을 잤고, 한 주 만에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10학년 때, 에드워드 머로 고등학교(Edward R. Murrow High School)에서 중퇴하였다. 고등학교를 중퇴했다는 이유로 아버지 제라르는 아들을 집에서 내쫓았고 바스키아는 브루클린에서 친구와 함께 머물렀다. 그러는 동안 티셔츠와 손수 만든 우표로 자급자족하였는데, 이는 그의 예술적 삶의 시작이었다.

미디어
1996년 그의 생애를 다룬 영화 바스키아가 만들어졌다. 바스키아 역은 제프리 라이트가 연기했다.

출처 : 위키백과

 

장 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미국의 그래피티 아티스트. 통칭 검은 피카소로 불리는 인물이다.

길거리 예술가로서 활동하다가, 후에 그의 작품은 뉴욕의 컨템포러리 아트 씬에서 큰 주목을 받게 된다. 그의 작품은 아프리칸 아메리칸 문화, 푸에르토리코 문화, 그리고 도시적인 환경에서의 경험 등 다양한 주제를 다뤘다.

낙서, 인종주의, 해부학, 흑인영웅, 만화, 자전적 이야기, 죽음 등의 주제를 다루어 충격적인 작품을 남겼다. 팝 아트 계열의 천재적인 자유구상화가로서 지하철 등의 지저분한 낙서를 예술 차원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키스 해링과 같이 거리예술의 틀을 구축한 1세대 그래피티 아티스트로, 현 세대 그래피티라이터들 사이에서는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전설적인 아티스트이다. 그의 스타일은 간단한 그림과 글씨, 독특한 도안, 그리고 선명한 색채를 통해 특정지어진다.

 

생애

1960년 뉴욕 브루클린 파크 슬로프에서 아이티 출신의 회계사인 아버지 제라르 바스키아(Gerard Basquiat)와 패션디자이너인 푸에르토리코 혈통의 어머니 마틸드 안드라데스(Matilde Andrades) 사이에서 중산계층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장미셸 바스키아는 유색 인종으로서 차별을 경험했다. 바스키아가 7세 되던 무렵 부모가 이혼하자 수차례 가출을 시도하고 다니던 학교마저 뛰쳐나왔다. 우울한 어린 시절을 보낸 바스키아는 1980년대 당시 브레이크 댄스, 펑크족의 출현, 레게, 힙합 등의 흑인 문화의 영향을 받아 그래피티를 그렸다. 바스키아는 슬럼가에 사는 10대들이 그린 낙서에 담긴 특유의 반항 의식을 예술로 만들었다.

 

이후 바스키아는 영재들을 위한 시티애즈스쿨(City-as-School)에서 낙서 화가 알 디아즈(Al Diaz)를 만나 낙서그룹 SAMO(Same Old Shit의 약자)를 조직하고 스프레이 낙서를 시작하였다. 그 후 뉴욕현대미술관 앞에서 엽서와 티셔츠 위에 그림을 그려 팔면서 자신의 회화 세계를 구축하였다. 또한 맨해튼 이스트 빌리지의 미술대학(시각예술학교)을 다니던 이들과 유흥가에서 어울렸고, 특히 이 시기 바스키아는 키스 해링과 만났다고 한다. 이후 1980년 바스키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앤디 워홀을 만나게 된다.

 

바스키아의 천재성을 단번에 알아본 워홀은 바스키아를 자신의 스튜디오인 '팩토리'에 자유롭게 드나들게 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워홀은 자신의 재력과 타고난 마케팅 실력을 바탕으로 '화가 바스키아'의 몸값을 끌어올렸고 바스키아는 그런 워홀 덕분에 '유명한 화가'라는 목표에 점점 가까워졌다. 그러나 성공이 반드시 행복을 보장하지 않았는데 전에 없던 독창적인 작품 세계로 뉴욕 미술계를 휩쓸었던 바스키아는 어느덧 자신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성공한 사람이 되어있었고 그 유명세로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바스키아는 워홀에게 이용당했다.', '워홀과 바스키아는 동성연애 중이다.' 같은 여러 소문들과 갈등이 바스키아를 괴롭혔고 결국 바스키아는 워홀과의 공동 전시 실패를 계기로 교류를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1987년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는데 바로 워홀의 사망 소식이었다. 이 소식은 바스키아에게 큰 상실감과 심각한 마약 중독을 초래했는데 결국 바스키아는 헤로인 중독으로 1988년 27살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바스키아는 마치 원시인이나 어린 아이같은 그림을 그린다. 후대의 평론가들은 바스키아의 그림을 인종 문제를 비롯해 당시 뉴욕의 전반적인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비극과 유머가 공존하는 풍자적인 화풍이 그의 아이덴티티다.

 

특정 아티스트 그리고 흑인들에 대한 존중에서 시작된 이 왕관은 훗날 왕관만을 그려 넣는 것 외에 점차 본인의 서명으로 사용했을 정도로 소유권과 권위를 나타내는 ‘도장’과 다름 없는 부분이 되었다.

무제'(Untitled), 제작연도 1982년

작품 무제가 소더비 경매에서 일본의 패션 이커머스 조조타운의 창업자 마에자와 유사쿠에 의해 앤디 워홀의 기존 기록을 뛰어넘는 최고 가격인 110,500,000 달러로 낙찰되었다!!

출처: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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