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기록화 (宮中記錄畵)
조선시대 국가와 왕실 차원에서 거행된 각종 의식과 행사를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 궁중행사도.
양반사대부의 집안 행사를 그린 사가기록화(私家記錄畵)에 대비되는 개념이다. 넓은 의미로 볼 때 의궤(儀軌)에 수록된 그림인 의궤도(儀軌圖)도 왕실과 국가의 각종 행사를 시각화한 그림이라는 의미에서 궁중기록화에 포함된다. 그러나 좁은 의미로 쓸 때에는 마치 한 장의 사진처럼 국가 행사를 사실적으로 재현한 궁중의 행사기록화, 즉 궁중행사도(宮中行事圖)를 지칭한다.
궁중기록화의 주요 내용은 각종 궁중 연향, 기로소(耆老所), 과거시험과 방방(放榜), 개천의 준천(濬川), 이조와 병조의 인사행정, 진하(陳賀), 책봉(冊封), 능행(陵幸) 등이며, 관례(冠禮), 성균관(成均館) 입학, 회강(會講) 등 왕세자와 관련된 의식도 있다. 이 중에서 궁중연향의 주제는 국초부터 대한제국기까지 매우 빈번하게 그려졌으며 현재 남아 있는 궁중기록화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즉 진작(進爵), 진찬(進饌), 진연(進宴), 양로연(養老宴), 친림기로연(親臨耆老宴), 친림사연(親臨賜宴), 선온(宣醞) 등 각종 궁중의 연향이 모두 그림으로 남아 있다. 현전하는 궁중기록화 중에서 가장 시대가 올라가는 그림은 1535년의 「중묘조서연관사연도(中廟朝書筵官賜宴圖)」이며 가장 시대가 내려가는 그림은 1902년의 「고종임인진연도병(高宗壬寅進宴圖屛)」이다.
궁중기록화의 제작 연원은 조선초기부터 관료사회에 만연해 있던 계회도(契會圖)의 제작 관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각 관청에 소속된 관료들이 관청별로 계회를 열고 참석한 사람 수대로 기념화를 그려 나누어 갖는 관행이 있었다. 이러한 계회도의 제작 관행은 국가의 특정한 행사나 의례, 혹은 기념할만한 사건 뒤에 참석자들의 자발적인 발의와 합의에 의해 기념화를 그려 나누어 갖는 풍습으로 확산되었다. 이때 행사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현하기 시작한 데에서 궁중기록화는 시작되었다.
16․17세기의 주요 궁중기록화는 1535년 중종이 세자시강원의 서연관들에게 내린 사연을 그린 「중묘조서연관사연도」, 1560년 서총대에서 문무신의 제술(製述)과 기사(騎射)의 실력을 시험한 뒤 베푼 사연을 그린 「서총대친림사연도(瑞葱臺親臨賜宴圖)」, 1664년 함경도에 처음 과거가 개설된 것을 기념하여 제작된 「북새선은도(北塞宣恩圖)」 등이 있다.
<서총대친림사연도(瑞蔥臺親臨賜宴圖)>는 1560년(명종 15) 9월 창덕궁 뒷뜰에 있는 서총대에 왕이 행차하여 재상들이 참여한 가운데 베푼 작은 연회 장면을 그린 것이다. 명종(明宗)은 이날 서총대에서 문신에게는 어제(御製: 임금이 직접 내린 제목)를 내려 시를 짓게 하고, 무신에게는 짝을 지어 활쏘기를 시켰다. 그리고 어찬(御饌)을 나누어주고 호랑이와 표범의 가죽, 말 등을 성적이 좋은 사람들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중앙에 꽃무늬가 있는 큰 항아리가 있고, 붉은빛 단령을 입은 입시신(入侍臣)들이 각기 하나의 상을 앞에 두고 앉아 있다. 인물들은 가운데 맨 앞쪽에 서서 악기를 부는 악공을 보고 있기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술잔을 서로 나누기도 한다. 가운데로 나와 춤을 추는 인물들, 그리고 왕의 자리를 향해 앉은 악공과 기녀(妓女)들의 변화 있는 자세와 움직임이 보인다. 먹과 채색이 바래진 부분이 있으나 연회의 장면을 자세하게 잘 기록하여 보여주고 있다.
18세기에는 숙종과 영조가 기로소에 들어간 것을 기념한 『기사계첩(耆社契帖)』(1719년)과 『기사경회첩(耆社慶會帖)』(1744년), 1743년 성균관에서 작헌례를 마치고 활쏘기를 한 사실을 그린 「대사례도(大射禮圖)」, 1760년 영조가 개천(지금의 청계천)의 준설 사업을 완수하고 만든 『준천계첩(濬川契帖)』, 1795년 정조가 혜경궁을 모시고 사도세자의 현륭원 참배를 위해 화성으로 행차한 사실을 그린 「화성능행도병(華城陵行圖屛)」 등을 주요한 작품으로 꼽을 수 있다. 18세기에는 다른 시기에는 잘 볼 수 없는 내용의 그림이 많아 가장 다채로운 경향을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
화성능행도는 정조가 1795년 윤 2월 9일부터 16일까지 8일간 어머니 혜경궁 홍씨(1735~1815)를 모시고 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1735~1762)의 원소 현륭원顯隆園에 행차한 뒤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던 일을 그린 것이다. 1795년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탄신 일주갑이 되는 해로 정조가 현륭원 전배를 마친 뒤 화성 행궁에서 진찬례를 베풀어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자 세심한 배려와 치밀한 계획 아래 이루어졌다. 이를 기념하여 행사의 도설圖說을 김홍도에게 제작하게 하고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 그대로 담았다. 그리고 이 도설에 기초하여 김홍도를 따르던 김득신·최득현·이인문·이명규·장한종·허식 등에 의해 병풍으로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화성능행도"는 국왕의 친림, 호위하는 군사, 관료들과 구경나온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삼삼오오를 이룬 인물의 포즈를 다양하고 해학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시정을 리얼하게 묘사하여 당대 풍속적인 소재를 담은 기록화의 백미로 인정된다
그러나 19세기가 되면 궁중기록화에는 병풍그림이 크게 유행하고 진찬․진연과 진하례(陳賀禮)로 주제가 한정되는 등 매우 형식적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진찬․진연도병은 1848년 「무신진찬도병(戊申進饌圖屛)」에 이르러 전형(典型)이 이루어졌다. 진하도병은 인정전을 중심으로 한 창덕궁의 주요전각들이 파노라마식으로 장대하게 펼쳐지는 형식으로 그려졌다.
이외에도 왕권 강화의 움직임이 활발하였던 정조, 순조, 고종 연간에는 「왕세자책례도병(王世子冊禮圖屛)」(1784년), 『왕세자입학도첩(王世子入學圖帖)』(1817년), 『수교도(受敎圖)』(19세기 전반) 같은 왕세자와 관련된 그림들이 그려졌음이 주목된다. 궁중기록화는 당시의 정치적 기류를 민감하게 반영한 그림임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궁중기록화에는 대개 그림의 제작 동기가 적힌 서발문(序跋文)이 있는데 이를 통해 그림의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다. 또한 거의 모든 경우에 그림 제작에 합의한 관료들의 성명․자호(字號)․생년․본관․거주지․과거 급제년 등을 기록한 좌목(座目)이 수반된다. 이 좌목에 적힌 사람들은 그림 제작의 주체이면서 그림의 소장자임을 시사한다. 이와 같이 궁중기록화는 서발문 및 좌목과 더불어 그림의 제작시기를 분명히 알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궁중기록화의 제작자는 대부분 도화서의 화원이었는데 제작 화원의 이름이 알려진 경우는 많지 않다. 화원들은 한꺼번에 여러 건을 제작해야 하였으므로 여러 명이 공동작업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완성하기까지 시간도 오래 걸렸다. 궁중기록화는 시대에 따른 양식 변화가 많지 않은 매우 보수성이 강한 그림이다. 즉 정면부감의 시점을 위주로 하되 세부 표현에서는 여러 시점이 공존하는 점, 공필의 채색화인 점, 안정적인 좌우대칭이 선호된 점, 왕을 포함한 왕족은 그려지지 않은 점 등은 대한제국기가 끝날 때까지 변함없이 나타나는 특징이다. 18세기 후반 원근법, 명암법, 투시도법과 같은 서양화법의 수용으로 한층 깊은 공간과 사실적인 표현이 가능해진 것을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출처 : e-뮤지엄(전국박물관소장품검색), 한국민속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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