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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예술가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이탈리아 천재화가, 조각가

by 소소한그날 2025.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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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이탈리아 천재화가, 조각가
최근에 미켈란젤로에 대한 작품과 생애에 대한 이야기가 TV방송과 유튜브에서 다뤘다. 평소 존경하는 화가이자 조각가여서 검색해 봤는데 두 곳에 정보가 달라서 둘 다 올려본다. 그리고 재미있게 본 유튜브 채널도 아래에 연결해 놓았다.

미켈란젤로의 충실한 제자인 다니엘레 다 볼테라(Daniele da Volterra)의 작품, 나무에 유화 이 초상화는 미켈란젤로가 70세쯤 되었던 1545년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품

 

미켈란젤로 디로도비코 부오나로티 시모니(이탈리아어: 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년 3월 6일~1564년 2월 18일)는 이탈리아의 조각가, 화가, 건축가, 시인이다. 르네상스 시기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피렌체, 로마 등 이탈리아 여러 지역에 거주하면서 수많은 걸작을 남긴 위대한 예술가로 손꼽힌다. 그의 작품은 인생의 고뇌, 사회의 부정과 대결한 분노, 신앙을 미적으로 잘 조화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생애
미켈란젤로는 유년 시절부터 조토와 마사치오의 작품들을 습작하며 그림에 많은 관심을 쏟아 집안에서 자주 꾸중을 들었다. 소년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알아본 메디치가에서 아버지를 설득한 덕분에 미술 공부를 할 수 있었다. 13세 때 화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14세 때부터 메디치 가문의 보호를 받으며 베르트르드 디 조반니를 통하여 도나텔로 작품을 배웠다.

 

미켈란젤로 대표작
피에타
1499년 미켈란젤로는 로마에 체류 중이었던 프랑스 출신 추기경 장 드 빌레르의 의뢰로 후에 성베드로 대성당에 놓일 "피에타"를 완성했다. 이 작품은 르네상스 시대 조각 예술의 대표적인 명작으로, 그의 수많은 피에타 상 중 최초의 작품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을 자랑스럽게 여겨 유일하게 직접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다비드
1501년 피렌체로 돌아와 시청의 위탁으로 "다비드"를, 즉 소년 다윗 조각을 3년에 걸쳐 완성하였다. 계속하여 원형 부조인 성 모자를 만들고, 원형화 성 가족을 그렸다. 1504년 피렌체 시청의 위촉으로 대회장의 벽화 카시나 수중 접전도를 그리게 되었는데, 맞은편 벽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앙기아리 기마 접전도를 그렸으므로 경쟁을 하게 되었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1508년 바티칸 사도 궁전의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위촉받고 허리가 꺾이는 듯한 고통에도 4년 만에 완성하였다. 1520년 피렌체의 메디치가 예배당에 안치할 조각상을 10년에 걸쳐 조각하는 한편, 산 로렌초 성당 부속 도서관 입구를 건축하였다. 피렌체 공화국을 사랑한 미켈란젤로는 1529년 독일 카를 5세 군의 피렌체 포위 때 방위후에 메디치 가의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와 사이가 나빠져, 1534년 카를 5세가 침략할 때에 방위 의원으로서 성을 쌓아서 고향을 지키고자 할 정도로 사랑하는 고향인 피렌체를 영원히 떠나 로마에 정착했다. 피렌체를 떠날 때 그는 같이 일한 노동자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팔아서 임금으로 대신할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로마로 거주지를 옮긴 미켈란젤로는 새로운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시스티나 경당의 정면 대벽화를 위촉받고, 노령으로 발판 위에서 떨어져 가면서까지 혼자 꾸준히 그려 6년에 걸쳐 "최후의 심판"을 완성하였다.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의 실력을 존중하여, 어느 추기경이 미켈란젤로를 무지하다고 업신여기자, "무식한 사람은 추기경님입니다. 추기경님은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씀하며 편들어 주었다 한다.

1550년 바티칸 파올리나 예배당의 프레스코 벽화 "바오로의 회심"(1549년)과 "십자가의 베드로"(1550년, 성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처형되는 순교 그림)를 완성했다. 1542년 교황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에게 로마 가톨릭의 출발점인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를 그려 줄 것을 부탁했고, 미켈란젤로는 기독교 공동체의 선교사로서 경건하게 살아간 두 성인의 그림을 그리면서 로마 가톨릭의 지도자인 교종들을 비판하는 뜻을 담아냈다.

1550년대 이후 미켈란젤로는 죽음을 의식하면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그린 열두 점의 드로잉을 남긴다. 이는 그의 만년 스타일을 대표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미켈란젤로는 성 베드로 대성전의 돔, 성 베드로 대성전의 "피에타", 팔레스티나의 피에타, 론다니니 등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1564년 89세를 일기로 긴 생애를 로마에서 마쳤다.

율리오 2세의 영묘와 "모세" 1505~1545
1505년에 미켈란젤로는 새로 임명된 교황 율리오 2세의 초대로 로마로 들어왔다. 그는 교황의 묘를 짓는 일을 위촉받았다. 두 사람은 함께 거대한 예술 작품을 상상하는 동시에 세계의 여덟 번째 경이를 만들 꿈을 꾸었다. 3층 높이에 실물대 조각상 40점, 벽감, 엔타블러처, 괴이한 장식물, 청동 부조 등이 포함된 거대한 건축물 구상했다.

르네상스 시기의 가장 웅장하고 고상한 장례 기념물 중 하나인 이 건축물은 방대한 작업이었기 때문에 미켈란젤로에게는 평생의 부담으로 남았다. 그의 전기 작가이자 제자인 아스카니오 콘디비에 따르면, 미켈란젤로는 "나는 이 영묘에 묶여서 청춘을 다 보내고 말았다."라고 불평했다.

모세,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
교황의 후원을 받았으나, 미켈란젤로는 이 작업 외에도 수많은 작업을 맡아서 진행했기에 무덤을 완공하는 데 무려 40년이나 걸렸다. 본래 성 베드로 대성당에 세워질 계획이었으나, 나중에 율리오 2세를 기념하는 교회로, 베드로가 투옥되었을 때 묶였던 쇠사슬이 보관된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에 세워졌다. 완성된 모습은 처음 구상과 달리 2층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장대하기는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바닥에는 카피톨리노 언덕의 고대 폐허에서 가져온 60센티미터 높이의 '오래된 대리석' 조각 열세 개를 깔아 대좌로 삼았고, 그 위에 조각상을 놓아서 돋보이게 만들었다. 2층의 네 기둥은 위로 갈수록 좁아져서 관람자 시선을 저절로 하늘로 향하게 유도한다. 기둥 위의 기다란 촛대 네 개와 인간 형태의 문장은 건축물 전체가 하늘로 녹아드는 듯한 느낌을 조성한다. 위에 뚫린 직사각형 창문 넷과 오픈 아치에서는 교회 안쪽의 합창대 목소리가 울려나와 마치 천사들이 영혼을 영접하는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지상에서 천상으로 자연스레 영혼이 여행할 수 있도록 봉사하는 건축물을 이룩한 것이다.

모세,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

 

아래층 중앙에 놓인 1545년에 완성한 "모세"상이 가장 유명하다. “덩치가 엄청나게 큰 당당한 인물이라는 느낌이 실제와 상상 양쪽 측면 모두에서 작동한다. 그는 마치 하느님에게 말을 걸려는 것처럼 측면을 응시한다. 그는 이미 신성을 보고 온 사람이므로 그의 얼굴은 인간 이상의 얼굴이며, 따라서 평범한 인간들로서는 감히 쳐다볼 수 없는 얼굴이다. 상대방을 꿰뚫어보는 듯한 눈빛, 물결치는 얼굴 근육, 폭풍우 같은 머리카락, 짧은 두 뿔(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산할 때 그의 머리에서 뿜어져 나온 후광을 상징한다) 등이 "모세"가 내뿜는 강렬한 표현력에 기여한다. 기다란 오른손 손가락들은 묵직한 턱수염의 끝부분을 잡아당기고 있다. 잠재의식 속 생각이 무의식적인 불안한 동작을 활성화한 것이다. 소매 없는, 느슨한 상의는 대리석 조각의 한 걸작으로, 모세의 근육 구조를 감추는가 하면 드러낸다. 한편 무릎 위로 흘러넘칠 정도로 과도해 보이는 옷자락이 예언자의 독특하면서도 느슨한 각반과 신발을 오히려 잘 드러낸다.”

그 좌우의 두 여인상 "라헬"과 "레아"는 미켈란젤로가 온전히 완성한 최후의 조각상이다. 하늘에 호소하는 듯한 자세를 취한 라헬과 거울을 들여다보는 자세로 땅을 지향하는 레아는 서로 짝을 이루면서 각각 신앙과 선행, 명상적 생활과 활동적 생활을 상징한다. 본래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 남자 포로들과 달리, 여성이 모세의 좌우에 자리 잡음으로써 영묘 전체는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을 위한 모세의 투쟁(신체성)이 아니라 기도와 명상이라는 영적 언어(정신성)를 표현하게 되었다. 이는 이 영묘를 처음 구상했을 때인 서른 살의 미켈란젤로와 이 영묘를 완성했을 때인 일흔 살의 미켈란젤로의 차이를 보여 주는 듯하다.

2층 한가운데 누운 인물이 이 영묘의 주인인 교황 율리오 2세이고, 서 있는 모자상은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이다. 묘를 위해 만든 조각상 중 6점은 최종적으로 배제했다. 그중 "반항하는 노예"와 "죽어가는 노예"로 알려진 조각상 2점은 루브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나머지 4점은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갤러리에 있다.

시스티나 경당의 천장 벽화, 1508~1512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경당의 천장을 4년에 걸쳐 작업하였다.(1508~1512) 1508년 교황 율리오 2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경당의 천장을 그림으로 장식할 것을 명한다. 콘디비의 설명에 따르면, 브라만테가 성 베드로 대성당을 작업 중이었는데, 미켈란젤로가 교황의 묘 공사에 위촉되었다는 사실에 분개하다가 교황을 설득해 미켈란젤로가 실패하도록 그에게 생소한 과제를 주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는 원래 천장을 지탱하는 삼각 궁륭에 열두 제자를 그리고, 천장 중앙에 장식으로 처리하라는 위촉을 받았다. 미켈란젤로는 율리오 2세를 설득해 재량권을 얻고, 천지창조, 인류의 타락, 예언자를 통한 구원의 약속, 그리스도의 계보 등 다양하고 더 정교한 작품을 제시했다. 이 작업은 가톨릭 교리 대부분을 표현하는 그림들이다.

작품은 500평방미터의 천장 전체를 아우르며, 300명 이상의 인물을 포함하고 있다. 천장 한가운데에는 창세기에 나오는 아홉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고,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하느님의 천지 창조, 하느님의 인간 창조와 하느님 은혜 밖으로 타락한 인간, 마지막으로 노아와 그의 가족이 보여 주는 인간의 상태이다. 천장을 지탱하는 삼각 궁륭에는 예수의 탄생을 예언하는 인간 열두 명이 그려져 있다. 이스라엘 예언자 일곱 사람과 고전 세계에 나오는 무녀 다섯이다. 천정 벽화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은 아담의 창조, 에덴 동산의 아담과 이브, 노아의 홍수, 예언자 예레미아, 그리고 쿠마에 무녀이다.

미켈란젤로는 4년 동안 발판 위에 누워서 작업해야 했고, 이로 인해 관절염과 근육 경련을 얻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감 안료로 인해 눈병도 생겼으나 1512년 마침내 작품을 완성했다.

시스티나 경당의 "최후의 심판" 1535~1541
1535년 미켈란젤로는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시스티나 경당의 정면 대벽화를 위촉받고, 6년에 걸쳐 "최후의 심판"을 완성했다.

출처 : 위키백과

 

아래 나무위키에서 가져온 내용은 위키백과에는 없는 내용을 추가했다.

 

생애

아버지 "로도비코 부오나로티"와 어머니 "프란체스카 부오나로티"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병약해서 그가 6살 때 세상을 떠나 어렸을 때 시골에 있는 유모의 집에 맡겨졌는데, 유모의 남편은 세티냐노의 석수장이였다. 이 사실은, 그가 후에 조각가로서의 재능이 가장 두드러지게 되는 데에 분명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 본인도 후에 자신의 글에서 "어렸을 때부터 조각용 끌과 망치를 갖고 노는 게 가장 즐거웠다"고 했다.

 

불행히도 그의 소년 시절은 생각 외로 그렇게 순탄치 못했다. 피렌체에서 공부하던 때에는 마을 행정관인 아버지 로도비코 디 레오나르도 디 부오나로티 시모니는 미켈란젤로를 예술가로 키우는 걸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피렌체에는 상업이 매우 발달하고 있어서 상업거래에 따른 계약서의 공증업무가 많았는데, 미켈란젤로의 아버지는 바로 그 공증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의 젊은 시절에는 유럽의 예술가들도 취급이 딱히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몰락 귀족이라도 귀족이라는 자존심이 있던 아버지는 미켈란젤로가 공부로 할 수 있는 직업을 갖길 원했지, 예술가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에 굉장히 분노했다. 삼촌들 역시 그런 미켈란젤로를 못마땅하게 여겨 그런 거 하지 말라고 했었다.

아버지와 삼촌들에게 두들겨 맞고 여러 차례 혼나고도,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예술혼이 불타오르는 걸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아버지와 삼촌들도 결국엔 포기하고 만다. 그러나 미켈란젤로가 후일 아버지에게 쓴 편지들을 보면 ‘아버지는 제가 번 돈으로 군주와 같은 생활을 하실 수 있다’ 라고 쓸 정도로 경제적으로 성공한다. 아버지 뿐 아니라 그의 형제들 또한 미켈란젤로의 덕을 톡톡히 본다. 그의 형제에게 쓴 편지에서도 본인이 가게를 차려 줄 테니 다른 짓하지 말라고 쓴 내용도 있다.

 

결국 그는 아버지의 허락으로 13세에 당시에는 굉장히 유명했던 화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제자로 들어가지만, 1년 만에 나오게 된다. 이유는 스승의 능력이 성에 차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기를란다요의 능력이 떨어졌다기보다 미켈란젤로가 너무 뛰어났던 거다. 또 알다시피 미켈란젤로 본인이 회화보다 조각에 더 흥미를 가졌던 것도 있다.

기를란다요는 예술 역사에서 손에 꼽는 천재를 잠깐이나마 제자로 둔 덕분에 자신의 작품이 미켈란젤로와 철저히 비교당하는 굴욕을 두고있다. 그래도 1년이나마 스승이었기 때문에 미켈란젤로의 회화가 기를란다요에게 영향을 받은 게 조금 보인다. 미켈란젤로와 비교당해서 그렇지 기를란다요 역시 세련되고 뛰어난 화가다.

 

로렌초 공을 만나다

그렇게 기를란다요의 화방을 나오지만 곧 그의 재능을 알아본 메디치 가문의, 정확히는 당시 메디치 가문의 수장 로렌초 데 메디치의 초빙에 의해 미켈란젤로는 15살에 팔라초 메디치에서 공부하게 된다.

폭군에 독재자라는 시각도 있지만,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는 예술을 사랑했고 젊은 예술가에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는 걸로 유명했다. 그는 자기 저택 정원에 '대리석 정원'이라는 걸 갖추어 놓고, 젊은 조각가들이 맘껏 공짜로 대리석에 솜씨를 뽐내도록 해주었다. 현재의 대리석 가격을 감안하더라도, 굉장한 대인이다. 다만 몇몇 역사가들은 이런 씀씀이 때문에 메디치 가문이 기울었다고 하기도 한다.

 

여기서 미켈란젤로는 연습작들을 몇 개 만드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판의 얼굴과 큐피드(혹은 에로스)이다. 이 2가지 작품은 모두 유실된 상태이다. 하지만 기록에 남겨진 묘사를 보면 어린 미켈란젤로의 담대함과 미숙하지만 재능있는 실력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작품들이었다고 한다. 판의 얼굴조각은 미켈란젤로가 메디치 가의 눈에 들게 되는 가장 큰 계기인데, 로렌초가 이 작품을 보고 미켈란젤로를 크게 칭찬하면서 "판은 나이가 들어서 이가 성하지 않을 텐데."라고 미술 평론을 하자,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작품을 자세히 감상하는 로렌초 공의 마음을 기뻐하면서, 다시 한 번 끌로써 뭔가를 조각했다. 로렌초가 "무얼 또 수정하는 거냐?"라고 물어보니까, 바로 판의 이에 충치를 조각해서 마무리지었다고 한다. 큐피드 작품의 경우, 미켈란젤로가 가장 아끼는 작품 중 하나였다. 작품을 나의 자식, 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인문학 수업
천부적인 재능을 알아본 로렌초의 배려로 메디치 가에서 몇 년 동안 지내게 된 소년 미켈란젤로는 로렌초 및 그의 아들들과 함께 식사를 할 정도로 파격적인 우대를 받았다. 로렌초의 아들들을 가르치기 위해 초빙된 당대의 유명인사들과 학자들을 만나 플라톤 철학을 배우고, 그들에게서 수준 높은 토론을 경청했으며, 우리 동아시아의 한문처럼 지식인들의 언어인 라틴어·문학에 대해서도 굉장히 수준 높은 인문학 교양을 익혔다. 특히 그는 단테의 서사시인 신곡을 좋아한 것으로 보이는데, 훗날 조각과 회화뿐만이 아니라 (사실 저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것도 굉장한 거지만) 건축, 시 등 그의 예술 작품 전반에 걸쳐 자신의 예술작품에 단테의 신곡처럼 고통과 순교, 그리고 구원의 주제를 늘 나타냈다. 로렌초의 차남이 훗날 교황 레오 10세가 되는 조반니 데 메디치이다. 다만 둘 사이에 개인적인 교류와 친분이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많이 남아있는 미켈란젤로 자신의 기록에도 그런 언급은 없다. 훗날 이들은 어린 시절의 인연보다는 후원자와 예술가로 기억되게 된다.

그러나 로렌초가 사망한 후 그의 장남인 피에로 데 메디치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했고, 미켈란젤로는 직감적으로 떠나야 할 때임을 알았다.

대표작
다방면에서 걸작들을 남겼는데, 본업인 조각에서는 다비드 상, 피에타 상이 있으며, 회화에서는 시스티나 소성당에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 등을 남겼고, 건축에서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계획했다.

피에타, 1498~1499년, 대리석, 174 × 195cm,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피에타
그리고 24세에 그는 〈피에타〉로 순식간에 거장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 지금도 이 작품은 모든 피에타의 관한 조각 중 최고로 꼽히며, 심지어 미켈란젤로 본인조차 이 작품을 능가하는 피에타를 다시는 만들지 못했다. 미켈란젤로가 이 피에타를 만들게 된 것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하나 있다. 메디치 가문을 나온 후 2년이 지나 미켈란젤로는 오랜만에 메디치 가문으로부터 작품 의뢰를 받아서 저택을 찾았는데 정원에 있는 잠자는 큐피드 상을 보고 지나가던 조각가가 '땅 속에서 찾은 것처럼 만들었으면 좋았을텐데.'라고 한 말에 아이디어를 얻어 미켈란젤로는 그 상을 똑같이 만들어 땅 속에 묻었다가 파낸 후 그을리게 만들어 마치 발굴된 고대 로마 조각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밀라네제라는 로마의 골동품상에게 팔았는데 밀라네제가 이를 포도밭에서 발굴된 로마 조각상이라며 고위 성직자인 리아리오 추기경에게 팔면서 문제가 된다. 후일, 위작에 사기당한 걸 알게 된 리아리오 추기경은 이 조각상을 만든 작가의 솜씨에 감탄하며 전령을 시켜 고작 20세의 어린 미켈란젤로를 찾아오게 된다. 이 잠자는 큐피드 사건은 미켈란젤로를 로마에 입성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리아리오 추기경이 미켈란젤로의 첫 후원인이 되면서 성 베드로 대성당의 피에타를 만드는 계기로 이어진다. 참고로 이때 밀라네제가 환불해준 큐피드 상은 미켈란젤로가 피에타로 명성을 얻고 난 뒤 더 비싼 값에 팔렸다.

이 피에타는 성모 마리아의 아름다움과 예수의 죽음을 슬프고도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사실 피에타상의 실제 크기는 2m 이상으로 굉장히 크다. 이 성모상은 비례학적으로 볼 때 미켈란젤로가 근육에 집착하여 불법 해부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오류가 심한데 이는 아래 쪽에서 석상을 올려다 보았을 때 예수의 시신만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2배 정도 크게 조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2m에 달하는 높이와는 달리 옆면의 두께는 1m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옷자락 주름의 입체감 때문에 깊이 있는 공간감이 효과적으로 나타났다. 또한, 다른 피에타 작품들은 마리아가 아기 예수와 눈을 맞추거나, 뺨을 맞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계단의 성모'를 포함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조각 작품에서는 마리아가 아들의 얼굴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아마도 이것은 미켈란젤로가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읜 것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라고 추즉하는 사람들도 있다. 바로 이 작품에서 마리아가 아들의 얼굴을 외면하도록 해서 아들을 처참하게 잃은 그 슬픔의 표현을 극대화하는 한편 장래의 부활을 믿기에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분석해본다. 물론 지나치게 젊고 아름다운 성모 마리아에게서 이질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었나 보다. 이에 미켈란젤로는 동정녀인 성모 마리아는 속세의 나이에 많은 영향을 받지 않기에 일부러 젊고 아름답게 조각했다고 한다. 이에 반해 예수의 모습은 그저 힘없이 축 늘어진 인간의 모습이나 위에서 보면 은은한 미소를 풍기고 있다.

 

이 성모상은 재미있는 점이 여러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는 미켈란젤로의 작품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그의 이름이 조각되어 있다는 점이다. 미켈란젤로가 이 조각으로 일약 스타로 등극하고 나서도 사람들이 이 조각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별로 관심을 안 갖자 열이 받아서는 밤에 몰래 성당으로 가서 자신의 이름을 조각했다고 한다. 성모 마리아의 옷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레이스 옷깃을 자세히 보면 라틴어로 "MICHAEL. ANGELVS. BONAROTVS. FLORENT. FACIEBAT(피렌체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만들었다)"라고 조각되어 있다. 이는 당시 기준으로 너무나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고 한다. 조각가가 자신 스스로의 사인을 그것도 성모 마리아의 옷깃에 조각으로 남기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도 이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기행으로 그친다. 일화에 의하면, 그렇게 피에타에 자신의 서명을 남기고 밤중에 길을 나섰는데 밤하늘을 보자 너무 아름다웠다고 느꼈단다. 그런데 미켈란젤로가 생각하기를 세상을 이렇게 아름답게 만든 하느님은 당신의 작품 어디에도 서명을 넣지 않았는데 자신은 고작 조각 하나에 오만하게 서명을 넣은 게 너무 부끄럽게 느껴져서, 그 이후 다시는 자신의 작품에 서명을 넣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혹은 자신이 만든 피에타가 처음 공개되었을 때 기대와는 달리 피렌체에 대한 언급 없이 로마 또는 롬바르디아 출신 예술가의 작품일 거라는 평가를 듣자 화가 나서 한밤 중에 대성당에 몰래 들어가 출신지와 이름을 새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2가지 일화 중 어떤 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훼손 사태 직후, 1972.5.21 / 파괴된 성모 마리아의 코와 왼팔

 

현재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 내 오른쪽에 전시되어 있다. 혹시라도 바티칸에 들른다면, 시스티나 소성당을 거치고 나서 바로 갈 수 있으니 꼭 들러볼 것. 석상은 방탄유리 안에 보관처리하였다. 그 이유는 테러와 같은 만일의 사태로부터 석상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1972년 5월 21일, 호주인인 토트 라슬로(Toth Laszlo)가 쇠지렛대로 피에타를 훼손시켰다.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던 토트는 "내가 바로 예수다, 우리 어머니는 저렇지 않다."고 망발하며 조각상을 훼손한다. 토트는 범행 후 1년간의 재판 끝에 이탈리아 정신병원에서 2년의 강제수용 치료처분을 받은 후 호주로 추방당했다. 이 사건으로 성모 마리아의 코가 파쇄되고, 왼팔을 비롯한 몇몇 부위가 훼손되어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피에타가 박살나서 사방팔방으로 파편이 튀자 비도덕적인 구경꾼들이 조각들을 자기 멋대로 주워가버린 탓에 회수된 부위는 전체 파손 부위의 43%에 불과했으며 코는 완전히 망실되었다. 결국 1976년이 되어서야 이탈리아 당국은 피에타를 성공적으로 복원할 수 있었고, 사건 이후에는 조각상을 아크릴 방탄판으로 보호함과 동시에 관람에 제한을 두게 되었다. 

다비드, 1501~1504년, 대리석, 5.17m, 피렌체 갤러리아 델 아카데미아

다비드

피에타의 유명세 덕분에 20대 초반의 나이에 거장의 반열에 오른 미켈란젤로는 1501년 8월 16일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위원회(오페라 델 두오모)로부터 성당의 북쪽 익랑(transept)위에 있는 부벽(buttress)에 올려 놓을 다윗을 조각해달라는 주문을 받고 계약서에 서명했다. 돌팔매로 거인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을 통해 압제로부터 시민의 자유를 쟁취한 피렌체를 나타내려는 의도가 담긴 작품이었다.


미켈란젤로에게 주어진 대리석 덩어리는 1464년부터 다른 조각가들이 작품을 만들려고 착수했지만 도중에 번번이 작업이 중단된 채 창고 구석에 방치된 상태였다. 1475년에 조각을 맡았던 안토니오 로셀리노가 초벌 작업으로 돌을 다듬어놔서 다비드가 골리앗의 머리를 밟고 있는 전통적인 자세를 나타내기에는 대리석의 여유분이 모자랐고, 이에 따라 미켈란젤로는 골리앗을 향해 새총을 쏘려는 자세를 선택했다. 밤낮 없이 매달려 작업에 매진한 결과 1504년 높이 5m가 넘는 다비드 상이 완성되었다.

그런데 6톤에 이르는 조각상을 성당의 높은 곳에 올리기가 쉽지 않아서 문제였고, 또 한가지는 다비드 상이 세상에 공개되자 세간의 반응은 가히 열광적이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반응은 아니지만, 동시대의 화가이자 <예술가 열전>의 저자인 조르조 바사리는 훗날 다비드 상을 가리켜 "고대와 근대, 그리스와 로마의 그 어떤 조각상보다 뛰어나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를 본 사람이라면 그 어떤 다른 조각가의 작품도 볼 필요가 없다"고 극찬했다.

이렇듯 장엄한 걸작을 성당 부벽 같은 곳에 갖다 둘 수 없다고 판단한 오페라 델 두오모는 다비드 상이 새롭게 놓여질 장소를 정하기 위해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산드로 보티첼리, 줄리아노 다 상갈로를 포함한 피렌체 시민 30인의 위원회를 소집하기에 이른다. 토의 결과 이 조각상을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피렌체 시청 베키오 궁전 앞에 놓기로 결정했다.

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다비드 상은 도나텔로가 제작한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청동상을 대체했고, 400년 가까이 광장에 우뚝 서 있던 다비드는 공해로 인한 훼손을 막기 위해 1873년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옮긴 뒤 복제품을 설치했는데 미술관 측이 다비드만을 전시하기 위한 특별실을 건축할 정도로 대우가 남달랐다.

다만 이 작품의 문제는, 미켈란젤로가 본래 메디치 가문의 지원을 받아 성장한 예술가였다는 점에 있다. 특히 메디치 가문의 군주였던 로렌초 데 메디치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미켈란젤로가 메디치 가문을 무찌른 피렌체 공화국을 찬양하는 조각상을 만들었다는 것이 특기할 점이었다. 실제로 미켈란젤로는 이 의뢰 당시에 이러한 논란에 대한 값까지 피렌체 정부에 요구하였으며, 이후 메디치 가가 피렌체로 복귀하였을 때 미켈란젤로는 한동안 고향을 밟을 수 없어 교황청의 의뢰만을 받으며 숨어 있기도 하였다. 메디치 가 복귀 이후 이 조각상의 파괴 또한 논의된 바가 있었으나, 르네상스의 중심에 있었던 가문답게 메디치 가는 그 예술성을 인정하고 대신 피렌체 공화정부를 밀어낸 메디치 가를 찬양하는 새로운 작품을 발주하였다. 바로 이 작품이 첼리니의 페르세우스로, 이 청동상에서 페르세우스가 들고 있는 메두사의 머리는 피렌체 공화 정부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 다비드 상을 잘 보면, 인체묘사에 진심이었던 천재 미켈란젤로의 조각상임에도 불구하고 인체비례가 미묘하게 맞지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특히 머리와 오른손이 상당히 큰데, 이는 본래 다비드 상이 두오모 성당 중앙 돔 천정 아래 끝선에 올릴 예정이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이렇게 되면 얼굴의 높이가 약 50m 지점에 위치하게 되는데, 바닥에서 올려다보는 사람들에게 조각상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게 된다고 판단한 미켈란젤로는 일부러 다비드의 머리 부분을 크게 제작했다는 것인데, 현재는 그 높이에서 보지 않으므로 머리가 살짝 크게 보이는 것. 위의 피에타 상도 비슷한 왜곡이 있기 때문에 현재는 이런 해석이 정설에 가깝다. 혹은 일부러 다비드의 의지와 강인함을 강조하기 위해 돌을 든 오른손과 골리앗을 노려보는 얼굴을 크게 만들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또 다비드 상의 눈을 보면 하트 형태로 눈동자가 만들어져 있는데, 이는 햇빛을 받으면 마치 눈이 이글거리는 느낌으로 나타나도록 표현한 것이다. 한편 다비드의 성기가 가려지지 않고 그대로 노출되었기 때문에 영국 런던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에서 전시되었을 때는,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방문을 대비해 30cm 길이의 무화과나뭇잎 석고 조각을 준비했다고 한다. 또한 다비드 상을 3D 프린터로 복제한 복제품을 두바이 엑스포에서 전시 했을땐 나체를 보여서는 안된다는 이슬람 율법 때문에 하체를 전부 가리고 위에서만 쳐다보게끔 전시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다비드상은 바닥에서 올려다보기 위하여 인체 비율을 일부러 변형한 작품이기 때문에, 두바이 엑스포처럼 위에서 보게 된다면 대두가 두드러져 보이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는 미켈란젤로의 의도를 왜곡하고 작품성을 망가트리는 결과가 되었다. 게다가 미국의 한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보여줬다가 '포르노'라는 일부 학부모의 항의로 교장이 물러나는 일이 벌어지자 이탈리아 측이 일침을 가했다.

 

회화

시스티나 천장화, 1508~1512년, 프레스코, 40.5 x 14m,  바티칸   시스티나 경당

시스티나 천장화
아담의 창조를 포함한 것으로 유명한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에 대해 저명한 미술사가 에른스트 곰브리치 교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회화작품이라 칭찬했다. 미켈란젤로는 성당의 천장을 다 덮은 이 거대한 회화를 경이적인 속도로 마쳤다. 보통 화가들은 그 10분의 1의 크기인 벽화도 3년 동안 그렸지만 이 못생기고 왜소한 예술가가 시스티나 소성당의 천장을 4년, 다비드 상을 3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그것도 남들을 훨씬 능가하는 자질을 보이며 끝내니 주변의 반응은 놀라움을 넘어선 경악. 거기에 벽화와 달리 미켈란젤로는 천장화였다. 더군다나 그는 스스로를 조각가로 생각하며, 그림을 그리는 걸 계속 거부했었다. 교황의 계속된 협박과 달램 끝에 그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시스티나 소성당 천장화 작업을 끝낸 것이다.

하지만 이 시스티나 천장화 작업 때가 미켈란젤로 입장에서 가장 우울한 때였을 거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일단 그가 회화라는 장르 자체를 싫어하는 데다가 하필 천장화. 조금만 잘못 하면 회반죽이 얼굴로 떨어지기 일쑤고, 이런 과정으로 이런 천장화를 그려내려면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그림을 그려야하기에 매우 하드코어 중에 하드코어이다. 거기에 그림을 그리려고 자세를 잡는 것 자체가 힘들고 전체적인 구도를 살피는 것도 어렵다. 그리고 설치해야 할 장비들도 많고, 결정적으로 매우 위험하다.

작품의 제작 과정에도 우여곡절이 있었다. 1508년 작업에 착수하고 처음 1년 동안 제법 빠르게 진도를 나가 1년 만에 50%를 완성하는 무시무시한 속도를 보였지만, 교황청이 제대로 봉급을 지급하지 않아 조수들이 몽땅 피렌체로 떠나버렸다. 이 때문에 미켈란젤로도 본의 아니게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고, 교황청이 다시 급료 지불을 시작한 1511년 10월에야 새로운 조수들을 고용해 작업을 재개, 1512년 9월까지 약 11개월에 걸쳐 나머지 절반을 완성해 천장화 전체를 완성시켰다. 그러니 실제 작업 기간은 약 2년인 셈. 게다가 후반기의 약 1년 동안은 새로 고용한 조수들이 영 상태가 좋지 않아 결국 미켈란젤로 혼자서 거의 다 작업을 맡아 했다고 한다.

최후의 심판, 1534~1541년,  프레스코 , 13.7 x 12m,  바티칸   시스티나 경당

최후의 심판
이 작품은 클레멘스 7세가 1535년 미켈란젤로에게 이 작품을 의뢰한 것으로, 그 배경에 로마의 황제 카를 5세가 로마로 쳐들어와 로마를 약탈한 역대급 참사가 있다.

"명색이 가톨릭 신자이며 로마인이라는 작자가 '로마 황제' 주도로 로마를 박살낸" 참상에 엄청난 분노를 느낀 클레멘스 7세는 "참 의인은 거둬들여지고 거짓된 자는 내쫓겨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란 의미로 이 작품을 기획해 의뢰하였다. 로마를 개박살 낸 것에 대한 분노는 의뢰를 수락한 미켈란젤로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던 것인지, 의뢰 의도에 아주 걸맞은 그야말로 분노가 가득한 불후의 걸작을 탄생시켜냈다.

클레멘스 7세는 계약서에 서명만 하고, 그 다음 교황인 바오로 3세 때에 작품이 완성되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에 많은 기대를 걸었던 바오로 3세는 1535년 9월 1일, 그를 '교황청의 최고 건축가, 화가, 조각가'로 임명하는 포고령을 반포하며 예우했다.

시스티나 천장화보다도 이쪽을 더 걸작으로 치는 사람들도 많을 만큼 대단한 작품이지만, 일반적으로 그려지는 성화와 다소 차이가 있다

사실 현대에 남아 있는 그림은 일종의 '수정본'으로, 원래는 쫓겨나든 거두어들여지든, 모든 등장인물들이 실오라기도 없는 말 그대로 나체 상태였다. 이는 종말 앞에서 한낱 인생은 그저 하느님께 구해달라고 갈구해야만 할 뿐인 미천한 존재임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다보니 당대에도 수많은 성직자들이 "이런 나체화는 성당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탄원했다. 하지만, 바오로 3세는 적당히 이 작품을 두둔했고, 끝내 성직자들도 탄원을 그만뒀다. 다만, 당시 교황의 의전담당관 '비아지오 다 체세나' 추기경은 나체로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보고 '나체들은 거룩한 장소에 적절하지 못하며 홍등가에나 어울리는 것'이라고 혹평을 했다.

분명 성도 로마의 가장 성스런 장소에 두기에 좀 뭣한 그림이기도하고, 애초 후원자가 교황청이었기에 미켈란젤로는 이런 혹평에 대해 불만을 표할 수 없었는데, 소소한 복수(?)로 6년 반에 걸친 이 그림 제작 과정에서 4구역의 오른쪽 하단에있는 카논의 배 부분에 복수의 의미로 '지옥의 수문장 미누스'로 표현된 비아지오 다 체세나 추기경을 직접 그려놓았다. 미누스의 귀는 당나귀귀로 표현되었는데 당나귀의 귀는 무지하다. 즉, 무뇌하단 상징이고, 성기마저 뱀이 물고 있게 그려 인간의 성적 방종에 대한 하느님의 가혹한 심판을 보여준다. 사실상 성직자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모욕을 날려버린 셈.

이런 미켈란젤로의 장난질에 머리 끝까지 화가 난 추기경은 교황인 바오로 3세에게 그림에서 자신의 얼굴을 빼줄 것을 탄원했지만, 바오로 3세는 혹여 자기도 천사에서 악마가 되어버리는 건 아닌가 싶어 "추기경님이 연옥에만 계셨어도 제가 어떻게 해보겠는데, 지옥은 제가 어떻게 해 드릴 수 없겠습니다."라며 묵살해버렸다.

낙성식은 1541년 10월 31일. 일설에는 낙성식 당일 벽화를 본 바오로 3세가 무릎을 꿇고 "하느님, 심판의 날에 저의 죄를 묻지 말아주소서."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 바오로 3세 선종 후 율리오 3세, 마르첼로 2세, 바오로 4세까지 이 성화에 대해 별 조치가 없었으나, 비오 4세 이후, 1564년 트리엔트 공의회가 로마 전례를 재정립하며, 기존 가톨릭 내에 잔재로 남은 '부적절한 풍습'을 상당부분 정리하게 되었고, 그 일환으로 천지창조도 덩달아 철거될 뻔 했다.

그러나, 하느님의 진노와 공의의 심판 앞에서 인생은 구원을 구걸하는 미천한 존재란 것을 강조한 의도 만큼은 인정을 받은 것인지, 이 작품을 성화로 인정하기는 하되, 대신 재정립된 로마 전례 상 나체화를 허용하지 않기로 한 것에 따라, '비속한 부분은 모두 가려져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져 대대적인 검열 작업을 받게 되었으며, 미켈란젤로의 제자인 다니엘레 다 볼테라가 그림의 인물에 옷을 그려 가리는 것으로 일단락이 된다.

 

건축

이미지 출처 : 성 베드로 대성당 홈페이지

성 베드로 대성당
교황 율리오 2세는 교황청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1506년 새로운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짓기로 결정하면서 콘스탄티누스 1세 때 세워졌던 낡은 옛 성당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사상 유례없는 대역사가 시작되면서 도나토 브라만테를 시작으로, 줄리아노 다 상갈로, 프라 조콘도, 라파엘로 산치오, 발다사레 페루치, 안토니오 다 상갈로 등 당대의 내로라 하는 건축가들이 설계에 참여했으나 공사 기간이 너무 길었기에 이들 모두 자신의 설계안이 현실에 반영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해당 건축가가 사망하면 다른 사람을 그 자리에 임명하는 방식으로 수석 건축가를 인선했기 때문에 후임자는 전임자의 설계안을 갈아엎고 자신만의 설계안으로 수정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도나토 브라만테는 성당의 평면 구조를 그리스 십자가로 설계했고 라파엘로 산치오는 브라만테의 설계안을 수정해 라틴 십자가 평면으로 바꿨으며, 발다사레 페루치는 라파엘로의 설계안을 수정해 다시 그리스 십자가 평면으로 돌아갔는데, 안토니오 다 상갈로가 전임자들의 설계안에서 이것저것 가져와 자신의 설계안에 합쳐 놓은 것이 바로 미켈란젤로가 수석 건축가로 임명된 1546년의 상황이었다.

1546년 안토니오 다 상갈로가 사망하자, 교황 바오로 3세는 70살을 넘긴 고령의 미켈란젤로에게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책임을 맡겼다. 임명 초 내키지 않아 하던 미켈란젤로는 곧 마음을 바꿔 정력적으로 공사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가 젊은 시절 로마에 왔을 때 봤던 유서 깊은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은 대규모 건물을 바란 율리오 2세의 의지 때문에 확실한 설계안도 마련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철거되었고, 이렇다 할 진전을 보지 못한 채 종교개혁과 사코 디 로마로 교황청의 위신이 곤두박질친 것과 맞물려 폐허와도 같은 풍경의 공사 현장은 가톨릭의 위기를 나타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미켈란젤로가 수석 책임자로 내정되기 10년 전인 1536년 당시 공사 현장 그림을 보면 어수선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미켈란젤로가 보기에 안토니오 다 상갈로의 설계안은 전임자들의 안을 절충하여 융합시키느라 이도 저도 아니었고, 외벽에는 열주가 지나치게 많으며, 공간도 지나치게 나뉘어 있던 것으로 보였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이 때문에 공사 소요가 길어지며, 채광이 부족해 실내가 어두울 것이라고 보았다.

미켈란젤로가 상갈로 지휘하에 대성당 공사를 맡았던 사람들을 모조리 내쫓고, 설계에 관여하고 싶어하는 건축 위원회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할 일은 공사 비용이 도둑맞지 않게 자금을 잘 관리하는 것뿐'이라며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하자 졸지에 실업자로 전락한 상갈로파 관계자들은 "미켈란젤로가 노망이 났다"며 수석 건축가 자리에서 몰아내기 위한 공작을 벌였다. 결국 교황 바오로 3세가 나서서 "공사에 관한 모든 전권을 미켈란젤로에게 위임하고, 건축 당국은 그의 설계대로만 공사를 진행해야 한다"고 못박으면서 미켈란젤로는 전임자들이 갖지 못한 특권을 얻게 되었다. 미켈란젤로는 그 당시까지 지어져 있던 상갈로의 외벽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에 있어서 건물 중심부에 거대한 돔을 얹는 것은 브라만테의 설계안 때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져온 것이었다. 그만큼 돔은 이 건물의 핵심 요소였으며 미켈란젤로도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미켈란젤로는 돔을 설계하기 위해 세계에서 가장 큰 돔이었던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 꼭대기까지 올라가 그 구조를 파악하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설계한 돔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과 유사하게 두 겹의 벽돌 외피로 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피렌체의 돔과는 다소 다르게 완전한 반구형의 돔을 설계하였으며, 16쌍의 뼈대를 돔 외각에 덧붙이고 그 아래 드럼에는 두 쌍의 기둥들을 배치했다. 그리고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의 지름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보다는 살짝 작게 설계되었다.

미켈란젤로는 돔의 완공을 보지 못한 채 드럼 일부만 완성된 상태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자코모 델라 포르타가 건축가가 되어 이 돔의 공사를 이어받았으며, 완성된 돔에는 대체적으로는 미켈란젤로의 설계가 반영되었지만 구조적인 이유로 외각 돔의 높이가 몇 미터 정도 높아져 반구형의 돔에서 첨두형의 돔으로 바뀌었다. 이는 원안보다 피렌체 성당의 돔에 가까워진 것.
미켈란젤로의 설계는 현재 지어진 성 베드로 대성당의 기본 설계가 되었다. 

캄피돌리오(이탈리아어: Campidoglio), 출처:위키백과

캄피돌리오 광장
고대 로마 시대에는 카피톨리누스 언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성지로 여겨졌으나 중세 이후 버려졌던 공간이다. 르네상스가 도래하면서 1537년 미켈란젤로가 이곳을 재개발하기 위해 광장의 설계를 맡았다. 그가 재개발에 참여할 당시에는 언덕에 세나토리오 궁전과 콘세르바토리 궁전(Palazzo dei Conservatori)만 있었는데 균형과 대칭을 위해 콘세르바토리 궁전 맞은편에 누오보 궁전(Palazzo Nuovo)을 세우고, 건물 3채가 자리잡으면서 생긴 광장의 형태는 사다리꼴로 잡은 후 중앙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청동 기마상을 옮겨 놨다. 광장 입구에는 포로 로마노에서 가져온 카스토르와 폴룩스 조각상을 배치했고, 전체적으로 로마 풍의 조각상들을 설치하였다. 건물에는 알베르티가 사용했던, 1층에서 2층까지 관통하는 기둥인 거대 오더(Giant order)를 사용한 것이 특기할만하다. 언덕으로 올라오는 계단인 코르도나타 계단은 위로 갈수록 폭을 넓게 만들어 아래쪽에서 보면 가파르지만 위쪽에서는 완만하게 보이는 착시 효과를 연출했다. 계단은 계단 간의 간격이 상당히 넓은데, 일설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말을 타고 캄피돌리오 광장까지 올라오도록 하기 위한 설계였다고 한다. 캄피돌리오 광장의 건물들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으로 평가받는다.

 

사망
미켈란젤로는 르네상스 3대 거장 중 가장 장수하여 르네상스의 말기까지 홀로 생존해 만 88세까지 활동했다. 지금도 그 정도면 꽤나 장수한 셈인데 당시 기준으로서는 상당히 오랫동안 천수를 누리다 사망한 셈.

그의 작품 론다니니 피에타는 미켈란젤로가 1552년부터 생의 마지막 날인 1564년까지 작업한 대리석 조각품이다. 여러 소식통에 따르면 실제로 세 가지 버전이 있었으며 이 작품이 마지막 버전이라고 한다. 론다니니라는 이름은 이 조각품이 로마의 론다니니 궁전(Palazzo Rondanini)의 안뜰에 수 세기 동안 서 있었다는 사실에서 유래했다. 일부 소식통에 따르면 전기 작가 조르지오 바사리가 1550년에 이 피에타에 대해 언급했다고 하는데, 이는 당시에 첫 번째 버전이 제작 중이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 작품은 현재 밀라노 스포르차 성에서 2015년에 개관한 피에타 론다니니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마지막 조각품은 1499년 피에타에서 처음 탐구했던 죽은 그리스도의 쇠약해진 시신을 애도하는 성모 마리아의 주제를 다시 한 번 다루었다. 그의 후기 십자가 연작과 자신의 무덤을 위한 그리스도의 안치 조각과 마찬가지로, 이 조각은 미켈란젤로가 자신의 죽음에 대한 감각이 커지고 있던 시기에 제작되었다. 그는 노년에 접어들어 시력이 약해져 앞이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촉각에 의지해서 죽기 불과 6일 전에도 하루 종일 이 조각을 작업했다. 그의 유언은 '''Ancora Imparo'''(나는 아직도 배우고 있다). 영어권에서는 I'm still learning이라는 이탈리아어에서 영어로 번역된 문장이 유명하다.

출처:나무위키

 

미켈란젤로에 대한 영상

https://youtu.be/01Sq3g1Bni0?si=61-HsC89kefqHE5k

톡파원 25시

 

https://youtu.be/jlAWoWAAoI8?si=bvUokuoQDMcHT8I1

롱테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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