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도 (牡丹圖)
화조화와 장식화의 소재로 애호된 모란꽃을 그린 그림.
모란(牡丹)은 꽃이 크고 그 색이 화려하여 동양에서는 고대부터 꽃 중의 왕으로 임금을 상징하며, 부귀화(富貴花) 등의 별칭으로 알려져 왔다. 조선시대 그림 속 모란은 새와 풀, 모란이 함께 어우러지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조선 초?중기에 자주 그려졌던 이러한 전통은 조선 말기까지 이어진다. 조선 후기에는 모란의 비중이 커지고 풍성함이 강조되며, ‘채색모란도’와 먹으로만 그린 ‘묵모란도’로 다채롭게 그려진다. 조선 말기에는 모란만 단독으로 그려지는 모란도가 유행했다. 모란 병풍은 조선시대 왕실에서의 종묘제례, 가례(嘉禮, 왕실의 혼례), 제례(祭禮) 등의 주요 궁중 의례와 행사 때 사용되었다. 10폭에 이르는 대형 화면에 연속적으로 펼쳐진 모란 나무들은 화려하고 당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색색의 꽃과 무성한 잎이 돋은 모란이 자연을 배경으로 하여 다양한 모양의 괴석과 어우러졌다. 이 작품은 조선시대 모란병풍의 전개과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주목된다.
모란은 고대부터 화조화와 장식화의 소재로 애호되었다. 문헌기록에 따르면 모란도는 삼국시대부터 그려진 것으로 보이나 현재 전하는 작품은 대부분 조선시대에 제작된 것이다. 조선 초 · 중기 다른 소재들과 함께 화조화의 일부로 묘사되던 모란은, 조선 말기로 갈수록 부귀영화의 상징성에 기복성(祈福性)주1이 더해지면서 단독으로 그려졌다.
특히, 조선시대 궁중행사와 국가의례에서 모란도 병풍은 국가와 왕실의 위의를 보여 주는 그림으로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국상(國喪) 등의 흉례 및 관례, 가례, 길례를 비롯하여 혼전과 어진 봉안처에도 배설되는 등 왕을 상징하는 자리에 널리 사용됐다. 이후 민간에서도 궁중의 모란도 병풍을 모방한 작품이 다량 제작되었다.
모란은 꽃이 크고 탐스러우면서 색이 화려하고 기품이 있어 찬탄을 받았다. 중국 진주2한[^3]시대 이전에는 약재로 여겨지다가, 남조주4 때 관상화로 문헌에 등장하며 당주5대에는 ‘국색천향(國色天香)’이라 하여 중국을 대표하는 꽃으로 자리 잡았고 부귀와 아름다운 여자를 상징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선덕여왕 때, 당 태종이 세 가지 색으로 그린 모란도와 씨 3되를 보내왔다는 고사가 『삼국유사』 「선덕여왕 지기삼사(善德女王知機三事)」에 전하며, 설총이 지은 「화왕계」에서는 ‘꽃 중의 왕’으로 불리며 군주로 의인화되어 나타난다.
모란도는 중국에서 당나라 때부터 그려졌는데, 크게 두 가지 흐름을 보인다. 하나는 서상주6지물이자 성군의 상징이라는 인식 아래, 서상화(瑞相畵)로서 왕실에서 제작된 그림이다. 중앙의 축을 따라 수직병렬식으로 전개되고 정면성과 평면성, 장식성이 강하다. 송주7대 제작된 「화왕도(花王圖)」(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소장)나 서희(徐熙)가 그렸다고 전하는 「옥당부귀도(玉堂富貴圖)」(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소장)이 이에 해당한다. 고려시대의 모란도는 전하는 것이 없으나, 모란을 성덕의 상징으로 여겼음이 『고려사절요』 등의 문헌기록에 나타난다. 또 이러한 전통이 조선시대 궁중행사 및 국가의례에서 모란도 병풍이 두루 사용된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화조화로서 모란도는 송대 주돈이(周敦頤)가 「애련설(愛蓮說)」에서 ‘모란은 부귀’에 해당한다고 정의하면서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꽃 그림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상징성 때문에 모란은 북송주8, 고려대에 이미 도자 · 복식 · 건축 · 공예 등의 주요 의장문양으로 널리 활용되었다. 북송 이후에는 화조화의 발전과 함께 사실주의에 기반을 둔 모란도가 출현하였으며 명주9 · 청주10대에 양식화를 거치며 기복성이 더해졌다. 처음에는 채색화로 그려졌으나 11세기 말 이후 수묵기법의 모란도가 출현하면서 수묵화와 채색화로 모두 그려졌다.
조선시대 모란도
화조화로서의 모란도
모란도는 단독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바위와 나무, 새 또는 나비 등의 곤충, 사군자류의 식물과 함께 그려졌다. 조선 전기의 단독 모란도는 전하는 것이 거의 없으며 작약, 동백 등과 함께 화조화를 구성하는 기화요초(琪花瑤草)주12의 하나로 그려졌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모란의 비중이 커지고 단독 화제로 발전하였다. 특히 18세기의 모란도는 발묵주13 효과를 이용하여 모란꽃의 풍성함을 강조하면서도 사의성이 짙다. 강세황(姜世晃), 심사정(沈師正), 최북(崔北) 등이 몰골법을 이용하여 절지(折枝)주11 형태의 모란도를 그린 예가 많고 화가에 따라 채색을 사용하였다. 이는 조선 후기 남종화풍의 수용 및 명 · 청대 화보의 유입, 화훼에 대한 높은 관심, 화훼 완상 및 정원 문화의 보급 등과 관련이 깊다.
19세기에는 남계우(南啓宇)가 공필진채로 모란을 그렸고, 전기(田琦) · 허련(許鍊) · 김수철(金秀哲) 등의 중인 직업화가들은 사의성이 강하면서도 개성적인 화풍을 보여 주었다. 이 시기의 모란도는 다양한 채색을 사용하면서도 사실적이기보다는 추상적이고 현대적인 구도를 취한다. 또한 장수를 상징하는 괴석이 함께 배치되었으며 제화시에서도 모란이 갖는 길상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커진다.
궁중회화로서의 모란도
조선시대 궁중행사에서 모란도 병풍을 사용했다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1627년 『소현세자가례도감의궤』에서 보인다. 현재 전하는 궁중 소용의 모란도 병풍은 대부분 19세기 이후 제작된 것이다. 4폭 · 6폭 · 8폭 · 10폭 병풍 형태로 전하며, 크기는 병풍 높이가 250㎝에서 330㎝에 달하는 것과 200㎝ 이하의 것이 있다.
도상에 따라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모란나무가 전체 화면에 걸쳐 연결되는 왜장(倭裝)병풍 형식이며, 다른 하나는 둔덕 위에 수직으로 뻗은 모란이 개별 폭마다 독립적으로 배치되는 형식이다. 현재 전하는 대부분의 모란도 병풍이 이에 해당하며 모란꽃의 도상이 반복적이고 도식적이며 평면성이 강하다. 하단에 괴석이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로 나뉜다.
민간에서도 두 번째 유형의 모란도 병풍을 모방한 작품들이 다량 제작되었다. 일반적으로 모란꽃은 정면의 만개한 모습, 측면의 만개한 모습, 막 피어나기 시작한 모습과 봉오리로 묘사되며 짙은 홍색과 옅은 홍색, 짙은 청색과 옅은 청색, 황색, 백색으로 채색되었다.
현황
조선 후기 단독으로 그려진 모란도로는 발묵기법이 돋보이는 강세황의 『표암첩』 중 「모란도」 , 심사정의 『제가화첩』 중 산뜻하게 채색한 「모란도」 (이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허련의 「묵모란」 (6폭 병풍, 홍익대학교 박물관 소장) 등이 있다.
조선시대 궁중에서 사용된 모란도 병풍은 국립고궁박물관 등에 다수가 남아 있다. 개별 화폭에 수직으로 뻗은 모란나무를 묘사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모란도」(10폭 병풍)는 물가 언덕 위에 바위 혹은 괴석과 어우러진 모란나무를 왜장병풍 형식으로 묘사했는데,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묘사가 엿보여 형식화되기 이전의 작품으로 보인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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